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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의 추억 (4월 25일)

◆ 감독: 봉준호
◆ 각본: 봉준호
◆ 배우
- 김상경 (Kim Sang-Gyeong)
- 송강호 (Song Gang-Ho)
- 김뢰하
- 송재호
- 변희봉
- 박해일 (Park Hae-IL)
- 전미선
◆ 원작: 김광림
◆ 음악: 타로 이와시로
◆ 제작: 차승재 (Cha Seung-Jae)
◆ 촬영: 김형구
◆ 편집: 김선민

주지하다시피, '살인'과 '추억'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조합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보고나면 이보다 훌륭한 타이틀을 붙이기도 힘들 것이다. 어느새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린 화성연쇄살인 사건... 봉준호 감독은 15년이 지난 지금 왜 이런 얘기를 가지고 나왔을까. 혹자는 그의 전작 '플란다스의 개' 를 시나리오의 승리로 표현하기도 했다. 나는 그 때 피곤한 와중에 '사무라이 픽션'과 '플란다스의 개'를 연속으로 봐서 영화를 제대로 음미하진 못했다. 그러나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영화였다는 기억이 남아있다.

송강호다. 실제와 연기, 애드립과 대사의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며 관객을 사로잡는다. '연기 잘한다' 와 '진부하다'의 논란속에 서있던 그가 이 영화 한 방으로 모든 논란을 잠재운다. 쉬리에서처럼 어색하지 않고 꼭 맞는 자기 옷을 입었다. 설경구가 '공공의 적'에서까지 '김영호'의 이미지를 풍기던 것처럼 송강호는 약간의 코믹이 가미된 이런 캐릭터에 어울리는 배우인가 보다. 다시 말하자면 연기가 뛰어나다고 아무리 칭찬이 자자해도 코믹, 멜로, 스릴러를 넘나들며 자기 옷처럼 소화하는 배우라는 것이 정말 드물다는 말이다. 한때 박신양을 좋아하다가 그의 연기의 모든 것이 '편지'와 그거 뭐냐, Jessica의 Goodbye가 주제곡이던...전도연 나오는... 아, '약속'!... 암튼 그 두 영화에서 질질짜는 모습에 특화된 배우라는 것을 파악한 후 영화계를 떠나줬으면 한 적이 있었지만 지금와서 느끼는 것은 배우라는 사람의 역량은 둘째치고 관객이 그 배우를 보는 이미지때문에 전천후 배우라는 것이 나오기 어려운 것 같다. 그런면에서 안성기는 참으로 대단한 배우임에 틀림없다.

그들...

감독이 가장 찍어보고 싶은 영화 중의 하나, 상반된 성격의 캐릭터가 내러티브가 진행되면서 자연히 그 둘의 성격이 바뀌어버리는 영화라고 한다. 바로 이 영화, '살인의 추억'이다. 감으로만 수사하고 깡으로만 수사하던 송강호와 분석, 거짓말 하지 않는 서류로 일을 진행하는 김상경의 캐릭터가 나중에 구렁이 담 넘어가듯이 바뀐다. 송강호의 "너 많이 변했다."가 감독의 말을 대신한다. 권총을 들고 설치는 장면은 '미치도록 잡고 싶었습니다.'라는 캐치 프레이즈를 대변함과 동시에 캐릭터 변경이 최고점에 달했음을 시사하는 기막힌 장면이다.

그 뿐인가. 영화시작과 함께 나타나는 풍성한 벼들이 한들한들 평화로이 춤추고 있는 찰나 그 화면의 아래쪽에는 시체가 있다. 그 시작부분에서의 미장센이 예사롭지 않다. 역시 영화 진행 내내 이 영화의 미장센은 그야말로 예술이었다. 마치 그림을 그리기 위해 한참을 준비한 사과, 바나나, 바구니의 배치처럼 시종일관 이 영화의 구도는 환상적이었다.

이 영화에서 감독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부분은 코미디도 아니고 송강호의 움직임도 아니다. 그가 가장 중요시한 부분은 바로 '현실의 투영'이다. 88년 부터 91년 까지 총 10건의 살인사건이 화성에서 벌어졌지만 전경들은 시위진압이 첫번째 임무였고 정부는 올림픽이니 뭐니 하는 국제행사에만 신경쓰니 국내의 엽기살인사건은 그 중요도가 떨어진다고 느꼈나보다. 잠깐 뉴스에 등장하는 '권인숙 성고문' 사건이나 이 화성연쇄살인이나 정부의 관심거리가 아니었고 영화에도 등장하듯 '전두환 북미 방문'을 기념해 온 국민이 길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던 시절이었다. 곳곳에서 최루탄 냄새를 맡아야 했던, 최루탄 냄새만큼 지독했던 시절... 봉준호 감독은 그 시절을 연쇄살인사건이라는 맥거핀을 이용하여 예술적으로 그려내었다.

현재 거의 모든 평론들이 이 영화를 향해 최고의 찬사를 퍼붓고 있다. 덕분에 쓰레기 영화 '오, 해피데이'가 잠잠해졌다. 이 때 '동갑내기 과외하기'가 나왔어야 했다.

살인범이 이 영화를 어느 극장에선가 지켜보며 또 한번의 오르가즘을 느꼈을 수도 있다. 어딘가에서 행복한 가정을 꾸미고 여유로이 살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난 이 세상에 절대악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믿고 있다. 악은 있어도 절대악은 없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는... 따라서 나는 빈다. 영화에서 허수아비에 쓰여 있는 것처럼 언젠가는 그의 사지가 불타 없어지기를...